어려운 선택들(Hard Choice)

* 한국 트위터 스피어에서 읽게 되는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어떤 태도가 나에게 주는 공포에 관하여 꾸준히 말해온 바 있다. 항상 그러했듯이 미국 진보-페미니스트 블록 내부에서는 젊고 혁신적인 후보와 여성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이 가장 심화된 것이 샌더스와 힐러리의 경선일 것이다.

* 나는 미국인이 아니고, 미국 대선에서 누구를 뽑을지는 나에게 진지한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항상 말해왔듯이 내가 관심을 가지고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의 대선을 보는 어떤 한국인 집단들의 시각이다. 말하자면 '보수가 아닌' 샌더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이입한다든가, 'progressive'가 아닌 '진보'라는 말을 단선적으로 샌더스와 동치하여 힐러리 클린턴의 존재를 슬며시 지우는 태도, 혹은 '여성 대통령'이 가지는 의미를 불편하고 잘 들어맞지 않는 한국 정치상황과의 알레고리를 통해 비웃으며 눙치는 일면의 태도 같은 것들이다.

* 솔직히 말하자면 같은 기분을 샌더스 유세 중계를 보면서도 느낀 적이 있다. 샌더스에게 환호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것이 분명한, 젊은 남성들의 집단적인 괴성이 주는 공포가 있었다. 뭐, 이성애자 남성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이길 도리가 없다, 이런 기분이다. 내 목소리는 저 소리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면서 저 소리에 묻히고 말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공포인 듯하다.

* 이 글은 사실 번역을 해야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는 진보들의 글은 대개 "그럼에도 '이 때문에' 힐러리를 지지한다" 부분에서 꼬이고 만다. 그럼에도 번역을 굳이 한 이유라면, 이 공포와 억울함, 소수집단으로서 가지게 되는 멘탈리티를 꽤 잘 서술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Slate의 이 글을 트윗한 어떤 사람의 트윗에 달린 답글들이 내 공포를 다시 한 번 예증하였다. 








나는 힐러리를 싫어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녀를 뽑을 생각이다.




힐러리 클린턴을 싫어할 때는 그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더 쉬웠던 것 같다.

2008년 민주당 경선 기간 동안 나는 젊은 여성들의 죄책감을 자극하여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할 것을 설득하는 2물결 페미니스트들과 힐러리 클린턴 자신에 대해 분노했다. 당시 나는, 끈질기게 중도만을 지향한 빌 클린턴의 실망스러운 임기를 뒤로 한 채 버락 오바마라는 탁월한 인물을 뽑을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오바마라는 매력적인 대안 앞에서 어떻게 빌 클린턴의 아내를 선호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국론을 통합하겠다는 오바마의 약속을 조롱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열리고, 빛이 내릴 것이며, 천상의 성가대가 노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옳은 일을 하면 세상이 완벽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시 그녀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영감을 심어주는 데 실패한 것만이 아니었다 –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 자체를 비웃는 듯했다.

나는 힐러리 클린턴이 해온 실망스러운 일을 모두 기억한다. 복지개혁을 찬성한 일, 이라크 전쟁에 찬성한 일, 국기를 태우는 일을 처벌하는 상원 법안을 공동발의한 일. 클린턴이 페미니스트적인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통렬히 논박하는 글을 쓰고 또 썼다. 사실 나는 그녀가 “많은 개발도상국 또는 위기에 처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인물의 아내나 딸이 그의 유산을 승계하겠다는 현상”을 예증한다고 주장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로빈 모건, 린다 허시만 같은 윗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오바마를 지지하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을 폄하했을 때 나는 격노했다. “페미니즘이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것과 동치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 따위 것과는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웃음치며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8년이 지난 지금 내가 클린턴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한 좌파적 비판에 짜증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말하는 클린턴이 안 되는 이유를 나도 안다. 많은 부분 동의한다. 클린턴이 저지른 많은 과오가 그녀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의미할 위험성을 나도 우려한다. 그러나 지금, 이상론적인 정치운동을 펼치는 젊은이들에게 냉대 받는 그녀를 보며, 나는 기쁘다기보다는 슬프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8년 클린턴은 퍼스트 레이디 경력을 내세워 남편의 세 번째 임기를 위해 선거에 출마한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 그녀는 국무장관으로 괄목할 만한 경력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제 오바마 행정부의 뜻을 잇겠다며 선거에 나섰다. 그녀가 결혼한 사람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이제 거의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가 던지는 메시지 또한 다르다. 지난 번 경선에서 그녀는 대부분의 전략을 혐오스러운 마크 펜에게 위임하였는데, 그는 힐러리를 마거렛 대처처럼 터프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유권자들은 “여성 리더(first mama)”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리더가 여성인 것(first father being a woman)에는 열려있다”고도 썼다. 이번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페미니즘을 강조하고 있다. 유급 출산휴가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그녀의 핵심 공약이다. 심지어 가난한 여성들의 임신중절에 대한 연방 예산 지원 금지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했다. 임신중절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은 정치적 금기다. 힐러리 클린턴이 여성 권리를 앞장서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점점 여성 대통령의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흥분했고 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클린턴이 이번에는 아주 다른 유형의 후보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버락 오바마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연맹을 혁신적으로 확장한 정치적 재능을 지닌 사람이다. 버니 샌더스는 그보다 자신의 정치를 하는 좋은 사람이지만, 나는 그가 11월 대선에서 갈아뭉개질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 물론 샌더스 캠프는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선거장으로 불러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정치를 보아온 바에 따르면, 상호 연결되지 않은, 평소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이 충분히 진보적인 후보가 나온다면 갑자기 선거장을 가득 메울 것이란 꿈은 좌파들의 판타지에 불과했다.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희망적인 관측을 동원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 없다.

나도 여전히 버니 샌더스를 느끼고 플(feel the Bern) 때가 있다. 음침한 실용주의보다 정치 개혁의 쪽에 서는 것이 더 짜릿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저, 믿을 수가 없다. 말인즉슨 나는 수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에게 걸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클린턴에게 거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2008년 선거 이후로 나는 내가 한 때 클린턴을 반대하는 이유였던 더러운 타협을 클린턴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해가고 있다. 작년에 나는 the Nation에 그녀와 진보의 불편한 관계에 관한 커버 스토리를 썼다. 그녀의 자서전과, 그녀 남편이 이끈 행정부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녀가 함께 일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서, 그리고 1990년대 뉴스기사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지금처럼 기업에 영혼을 판 사람이라고 공격받기 전에는, 극단주의자 페미니스트라고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남편보다 좌파에 경도되었다는 비판을 들었고, 이는 남편의 정치적 생존을 위협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극도의 압박을 받은 끝에 그녀는 자신을 과하게 교정했고, 회의주의적인 주류 언론에게 그녀가 합리적인 중도주의자라는 사실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중도지향적인 태도는 그녀에게 있어 거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90년대부터 물론 미국 정치는 훨씬 더 양극화되었고 민주당원들은 좌파 축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클린턴에게는 비극적인 아이러니라고 해도 좋을 일이 일어났다. 이제 그녀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한 때 여겨졌던 것처럼 극단적인 좌파라는 사실을 다시 설득해야만 한다. 더 능숙한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클린턴은 그걸 하지 못한다.

나는 클린턴이 진정한 자신의 겉 표면에 견고한 외피를 만든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그녀보다도 지속적으로 대중의 검열을 받아온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수천, 수만 마디의 말로 그녀의 헤어스타일을 비웃었다. 그녀가 웃는 방식, 주름, 관절, 옷은 모두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미디어는 계속,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그냥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20년 연속 선정되었음에도 말이다.)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은 가드를 내리는 게 힘들 수밖에 없겠지! 그 정도의 자기방어기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녀의 자리에 있었던 다른 어떤 여성이라도 미치게 만들었을 대중적 조롱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클린턴이 그리 좋은 정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공격에 처했을 때 클린턴은 가드를 올리거나 물타기로 전환해버린다. 11월의 민주당 경선 후보 토론회에서 그녀는 월 스트리트와의 연관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9/11을 들먹였다. 바로 지난 주에도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정치적 기득권의 일부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골드만 삭스에서 자신이 한 강연회 원고를 공개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 원고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든, 계속 비밀을 고집하는 것보다 그녀에게 정치적으로 더 큰 타격이 될 수는 없음에도 말이다.

좀 더 민첩한 민주당원이라면 도널드 트럼프를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패한 시스템에서 쌓아온 경험 덕에 그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그녀는 Citizens United 판결(Super PAC이 헌법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하여 미국 선거를 금권선거로 바꾸었다고 비난받는 판결)을 뒤집을 연방대법관들을 임명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판결이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Super PAC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세계 권력의 중심에 그토록 가까이 서 있었으면서도 여성이기 때문에 종종 아웃사이더가 되어왔던 경험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녀는 유리천장 바로 아래 서 있을 때 어떤 기분인지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그녀가 겪어온 일들을 고려할 때 힐러리 클린턴이 유권자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가기 힘들어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그녀와 그녀가 이기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문제적 상황이다. 좌파이면서 클린턴 지지자인 것이 짜증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에 대한 진보세력의 비판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매파다. 그녀는 남편의 대통령 임기 중에 복지개혁에 찬성했다. 그녀는 월 스트리트가 미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조심스럽고 계산적이다.

그런데 이들 비판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엄연한 사실들이 또한 있다. 사람들의 평가에 따르면,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의 복지개혁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이는 그녀가 주장한 보편적 건강보험 프로그램이 1994년 중간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었다. 상원에서 그녀의 법안 찬반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오바마나 조 바이든보다도 좌측에 있다. 그녀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란 핵 협상을 열렬히 지지함으로써 그녀를 지지하는 억만장자 하임 사반을 잃었다. 그녀는 여성 재생산권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지지자였다.

진보주의자에게 있어 클린턴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녀에게 어느 정도 공감하느냐에 달려 있다.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그녀가 한 수천가지의 타협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타협을 정당화하는 일은, 내 생각엔, 늙었고 스스로 타협을 해본 사람에게는 더 쉬운 일이다. 실제로 종종 클린턴을 옹호하는 일이 중년을 옹호하는 일과 동일하게 느껴진다. 그 모든 기대가 옅어지고, 때늦은 후회의 무용함을 상기하게 되는 중년 말이다.

클린턴에게 공감하는 일은 그러나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는 그녀가 다시 한 번 대중적인 모욕을 겪는 모습을 보아 넘겨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의 페미니즘적인 주장에 대한 여성들의 무관심에 관한 이야기들, 그녀에게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소위 전문가들의 의견의 소용돌이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는 우파들만큼이나 좌파들도 나이든 여성을 한심하게 본다는 사실을 꾸준히 상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는 미국 사회주의의 재흥이라고 할 수 있을 샌더스 현상을 바라보면서, 기쁨만큼이나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클린턴이 오바마에게 진다고 하여 부끄러울 일은 없다. 그러나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기보다는 선언을 하기 위해 경선에 참가한 샌더스를 상대로 정치적 생명을 걸고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비참한 대중적 모욕이다.

이 모욕 중 어느 정도가 클린턴 개인을 향한 것인지, 그리고 또 어느 정도가 여성으로서의 클린턴을 향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앨 고어 또한 진정성을 연출해낼 줄 모른다며 미디어의 비슷한 조롱을 받지 않았던가. 앨 고어는 수많은 비투표층이 랠프 네이더에게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설 것이라는 말에 설득된 진보들의 비웃음을 받았었다. 그러나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첫 번째 여성이라는 점은 그녀가 받는 멸시를 더욱 심하게 한다. 그녀는 우리의 문화가 공적인 삶을 사는 여성에게 바라는 변화하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수차례 왜곡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믿을 수 없어 하는 이유를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렇게 된 이유를 또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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