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Sabbath) - 올리버 색스(Oliver Sacks)

* 8월 14일 뉴욕타임즈에 올라온 이 글은 아마 올리버 색스의 마지막 칼럼일 것이다. 색스의 글을 읽는 건 항상 즐거운 일이었다. 앞으로 새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번역해보았다. 고요, 안식, 평화가 그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RIP, Oliver Sacks.







올리버 색스



어머니와 어머니의 형제자매 열일곱 명은 정통파 유대교 전통의 영향 하에서 자라났다. 사진 속 외할아버지는 항상 야물커(유대인 모자)를 쓰고 있다. 듣기로는, 외할아버지는 자다가도 야물커가 벗겨지면 일어나서 다시 썼다고 한다. 나의 아버지 또한 정통파 유대교 가정 출신이다. 부모님 두 분 모두 제4계명(“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한 날로 지킬진저”)에 충실했고, 그래서 안식일(Sabbath, 우리는 리투아니아 유대인식으로 ‘Shabbos’라 불렀다)은 1주일의 나머지 6일과는 완전히 달랐다. 노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운전도, 전화를 사용하는 것도 안 되었다. 불을 켜거나 스토브를 데우는 것도 금지되었다. 하지만 의사였던 두 분에게는 예외가 필요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운전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필요할 때 두 분은 환자를 보고, 수술하고, 혹은 출산을 도와야 했으므로.

우리 가족은 런던 북서쪽의 꽤 정통파적인 유대인 커뮤니티인 크리클우드에 살았다.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식료품상, 청과물상, 생선장수, 이런 사람들이 모두 안식일(Shabbos)에는 미리 가게 문을 닫았고, 일요일 아침이 밝기 전까지 셔터를 올리지 않았다. 그들 모두, 그리고 모든 이웃이 우리랑 비슷한 방식으로 안식일을 보내고 있으리라, 그렇게 상상했다.

금요일 오후 무렵, 어머니는 의사로서의 정체성과 복장을 잠시 내려놓고 송어 요리 같은 안식일 음식을 만드는 데 집중하곤 했다. 해가 지기 직전 어머니는 제례용 초를 켜서, 그 불 주위에 손을 모아 쥐고, 기도문을 읊곤 했다. 우리들은 깨끗한 새 옷을 차려입고 안식일의 첫 번째 저녁식사를 위해 모여들었다. 아버지는 은으로 된 와인 잔을 들어올려 축복의 말과 키뒤시(안식일 찬송)를 읊고, 저녁식사가 끝난 뒤 우리의 찬송을 이끌었다.

토요일 아침, 나와 우리 형제들은 부모님에게 이끌려 왈름 레인에 있는 크리클우드 시나고그에 출석한다. 이스트엔드에서 크리클우드까지의 유대인들이 모두 예배를 보러 오던, 1930년대에 지어진 큰 시나고그이다. 유년시절 내 기억에 그 시나고그는 항상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좌석이 지정되어 있었다. 남자들은 아래층, 여자들 – 어머니, 고모, 이모, 그리고 사촌들 – 은 위층으로. 어렸던 나는 예배 중 종종 위층의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기도서의 히브루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 소리를 사랑했고, 특히 미성의 하잔(유대교 기도 선창자)이 이끄는 중세 기도송이 좋았다.

예배가 끝나면 우리 가족은 시나고그 밖에서 다시 모였고 – 보통 플로리 고모 댁에서 사촌 세 명과 함께 키뒤시를 읊으며 점심식사 전 간단하게 달콤한 레드와인과 꿀 케이크를 먹었다. 집에서 전날 해둔 찬 음식 – 송어, 데친 연어, 사탕무 젤리 – 으로 식사를 마친 뒤 토요일 오후에는, 부모님에게 응급 콜이 들어오지 않은 날에는, 친척들을 만났다. 삼촌, 고모, 사촌들이 우리집에 방문해 차를 마시거나, 우리가 그들의 집을 방문했다. 일가친척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모여 살던 때였다.

2차대전은 크리클우드의 유대인 커뮤니티를 박살냈다. 영국의 유대인 커뮤니티 전반이 전후 수천명의 사람들을 잃었다. 내 사촌들을 포함한 많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어떤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미국으로 이주했다. 나의 큰형 마커스도 1950년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 남은 사람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주류 사회에 동화되어 유대교 전통으로부터 멀어졌다. 내가 아이였을 때만 해도 가득찼던 우리 시나고그는, 해가 바뀔수록 점점 비어갔다.

1946년 내가 바르 미츠바(유대교 성인식) 구절을 암송하였을 때 시나고그는 비교적 가득 차 있었고, 친척 수십명도 함께 했다. 하지만 이것이 나의 마지막 유대교 의식이었다. 나는 유대인 성인의 종교적 의무 – 매일 기도하는 것, 매일 아침 기도 전 테필린(성구)을 착용하는 것 – 에 충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신앙과 전통으로부터 멀어져갔지만, 결정적인 균열은 18살 때 일어났다. 아버지가 나의 성적인 감정을 힐문하며,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만들었던 때였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나는 말했다. “그냥 그런 감정이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만 엄마한텐 얘기하지 말아주세요. 엄마는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바로 말했다. 다음 날 아침 어머니는 경악한 얼굴로 내려와 나에게 소리쳤다. “이 혐오스러운 것, 넌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해!” (어머니는 “누구든지 여인과 동침하듯 남자와 동침하면 둘 다 가증한 일을 행함인즉 반드시 죽일지니 자기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라는 레위기(20:12) 구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문제는 우리 집에서 다시 언급되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험악한 말로 인하여 나는 종교의 편협함과 잔인함을 싫어하게 되었다.

1960년 의사가 된 후, 나는 갑자기 가족과 커뮤니티가 있는 영국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신세계 미국으로 갔다.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여 머슬 비치의 운동하는 남자들, 그리고 UCLA의 신경의학 레지던트들 사이에서 일종의 커뮤니티를 찾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깊은 교감을 찾고 있었다. 이를 삶의 의미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런 교감을 찾을 수 없었던 나머지, 1960년대 동안 나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로 암페타민에 중독되었다.

나는 천천히 회복해갔다. 뉴욕 브롱크스의 만성질환자 병원에서 의미있는 일을 찾아내면서. (<깨달음(Awakenings)>에서 썼던 “카르멜 산(예언자 엘리야가 바알과 대결한 깨달음의 산)” 이야기다) 환자들에게 매료되어, 그들을 돌보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느꼈다. 알려지지 않은 상황, 대중들이, 심지어는 내 동료들도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말이다. 나의 천직을 찾아냈고, 그것을 끈덕지게, 우직하게, 동료들의 응원을 받지 못하면서도 계속 추구했다. 알지 못한 새 나는 당시 거의 사멸되었던 의료서사 작가가 되어 있었다. 이 장르가 사멸 직전이라는 사실에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19세기의 위대한 신경학적 사례보고라는 풍부한 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러시아의 신경의학자 A. R. 루리아로부터 힘을 얻었다) 외로웠지만 정말 만족스러운, 거의 수도승과 같은 이 일에 수년간 몰두했다.

1990년대 나는 동년배 사촌인 로버트 존 아우만을 만났다. 건장한 운동선수 같은 몸에 하얀 긴 수염을 한 그는 60살임에도 무슨 고대의 현자 같아보였다. 그는 위대한 지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인간으로서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리고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 사실 “신실함”은 그가 좋아하는 말이다. 지적인 작업에서는 경제학과 인간사의 합리성을 추구하면서도, 그에게 있어 지성과 신앙의 충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집 문에 메주자(유대인들이 문 앞에 다는 양피지)를 달 것을 강권하면서, 이스라엘에서 메주자를 하나 가져다 주었다. “자네에게 믿음이 없다는 건 알아.” 그는 말했다. “어쨌든 하나 달아두게.” 나는 굳이 반대하지 않았다.

2004년 인터뷰에서, 로버트 존은 수학과 게임이론이라는 필생의 작업에 대해 말하면서 30명에 이르는 아이들과 손자손녀가 함께 스키와 등산을 다니는 그의 가족(큰 냄비를 짊어진 코셔 요리사가 동행한다)에 관하여도 언급했다. 그리고, 안식일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해서도.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리고 믿음이 없다면 지킬 수 없지요.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개인 삶의 질을 높여주지요.”

2005년 12월, 로버트 존은 50년 동안의 연구를 인정받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노벨 위원회에게 그는 쉬운 손님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톡홀름까지 아이들과 손자손녀를 포함한 온 가족이 동행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모두 특별한 코셔 그릇, 식기, 음식, 그리고 성경이 금지한 모와 린넨이 들어있지 않은 특수한 예복을 필요로 했다.

바로 그 달에 나는 한쪽 눈에 암이 생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그 다음 달, 로버트 존은 나를 방문했다. 그는 노벨상과 스톡홀름에서의 식전에 관한 온갖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면서, 만일 토요일에 스톡홀름으로 이동해야만 했다면 상을 거절했을 것이라 덧붙였다. 안식일을 지키는 그의 믿음, 안식일의 평화로움과 세상만사로부터 떨어진 고요함은 심지어 노벨상도 이길 정도라는 것이었다.

내가 22살이었던 1955년, 나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에서 몇 개월 간 일했다. 물론 즐거운 경험이었지만, 다시는 가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많은 사촌들이 그 곳에 있었음에도, 중동의 정치지형이 불편했다. 무엇보다도 이토록 신실한 사회에 내 자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4년 봄, 우리 엄마의 제자이면서 98세까지 의료인으로 일했던 사촌 마저리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에, 나는 예루살렘의 마저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치 못하게도 마저리의 목소리는 여전히 힘있고 울림이 강했다. 우리 어머니와 비슷한 울림이다. “난 아직 죽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말했다. “6월 18일에 100세 생일을 축하하려고. 와주겠어?”

나는, “당연하지!”라고 답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을 때, 나는 60년 전부터 지켜온 결심을 단 몇 초만에 뒤집었음을 깨달았다. 이건 그저 가족을 방문할 뿐인, 그런 일이었다. 나는 마저리의 일가친척과 함께 그녀의 100세 생일을 축하했다. 런던 시절을 함께한 사촌 두 명과, 무수한 6촌 및 종질들, 그리고 물론, 로버트 존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가족들이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을 받았다.

이 정통파 유대교인 가족들에게 나의 애인 빌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조금 걱정되기도 – 여전히 어머니의 말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 하였다. 그러나 빌리 또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정통파 유대교적인 배경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태도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로버트 존이 나와 빌리를 안식일 첫 식사에 초대했을 때,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안식일의 평화, 세계가 멈추어버린 듯한 느낌, 시간이 흐르지 않는 느낌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와, 모든 것에 스며들었다. 나는 못내 아쉬움에 빠져들었다. 향수와도 비슷한 느낌이라 할 것이었다. 만약 이러저러한 조건들이 달랐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어떤 삶을 살았을까?

2014년 12월 나는 비망록인 <On The Move>의 초고를 편집자에게 넘겼다. 며칠 뒤 9년 전부터 있었던 눈의 흑색종으로부터 암이 전이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비망록을 완성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그리고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 섹슈얼리티를 완전히 솔직하게 선언하고, 숨기는 것 없이 세상을 마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올해 2월 나는 내 암의 진행상황, 그리고 곧 다가올 죽음에 관하여도 이와 같이 솔직해져야 한다고 느꼈다. 사실 뉴욕타임즈에 실린 <My Own Life>라는 에세이를 통해 이를 밝힐 때 나는 병원에 있었다. 7월에는 <나의 주기율표>라는 또 다른 글을 썼다. 물리학적 질서와 내가 사랑하는 원소들이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글이었다.

그리고 이제, 약해졌고, 숨이 딸리고, 한 때는 강건했던 근육이 암으로 녹아 없어진 지금, 나는 초자연적이거나 영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치 있는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생각하고 있다. 내 안에서 평화를 얻고 있는 셈이다. 생각이 계속 안식일을 향한다. 휴식의 날, 일주일의 일곱 번째 날, 그리고 인생의 일곱 번째 날이기도 한, 안식일. 할 일을 끝내고 좋은 마음으로 쉴 수 있는, 바로 그 날.

덧글

  • danaa 2015/09/20 18:10 # 삭제 답글

    번역 고맙습니다. 글 스크랩해갑니다.
  • W 2015/10/03 12:09 # 삭제 답글

    번역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한가지, 글 2/3지점에 1005년은 2005년의 오타같아 알려드립니다.
  • MECO 2015/10/26 14:14 #

    앗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
  • 볼매 2017/07/13 11:26 # 삭제 답글

    번역 너무 감사합니다.^^ 언제나 저렇게 올려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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