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이 장악하다


이 세 명의 맹렬한 여성 대법관들은 어떻게 대법원을 통제하게 되었는가

텍사스 주 임신중절권 사건에 관한 구두변론에서, 세 여성 대법관은 연방대법원의 세력균형을 뒤집었다.


달리아 리트윅



연방대법원이 임신중절권에 관한 기록적인 사건을 마지막으로 다룬 것은 1992년 4월의 일이다. 이 사건이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사건이다. 당시 산드라 데이 오코너는 유일한 여성 대법관이었다.

24년이 지난 지금, 연방대법원에는 세 명의 여성이 있다. 그리고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페미니스트 중 한 명으로 친다면 –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 이번 회기에 심리중인 기록적인 임신중절권 사건인 호울 우먼즈 헬스 대 헬러스테트(Whole Woman’s Health v. Hellerstedt) 사건에서 대법관들의 의견은 정확히 4:4로 갈린다는 점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쪽에는 텍사스의 병원들이 상고할 만한지에 관하여 이들을 대리하는 여성 변호사를 괴롭히는 깐깐한 남성 대법관들이 있다. 다른 한 쪽에는, 여성들의 건강 증진이라는 목적에 부합하지도 않으면서 사실 꽤나 멍청한 임신중절 규제를 신설한 텍사스 주의 법무장관에게 맹공을 퍼붓는 네 명의 따끈따끈한 페미니스트 대법관들이 있다.

이제야말로, 역사상 처음으로, 연방대법원 내의 젠더에 관한 논쟁의 장이 균형을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 대법원의 여성 대법관들은 규칙을 위반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해진 것으로 보인다. 시간제한 규정은 너무 많이 어겨져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이 규정의 집행을 거의 포기했다. 나는 로버츠 대법원장이 변호사들의 변론을 종료시키려고 시도하는 중에,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과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간단하게 그를 무시하고 더 많은 질문을 하는 장면을 적어도 두 번은 봤다. 더 이상 착하게 굴지 않겠다고 결심한, 연방대법원의 화난 여성들 앞에서 로버츠 대법원장이 통제력을 상실하는 그 광경은 멋지고 상직적인 구석마저 있었다.

이 사건 심판대상 법률은 2013년부터 텍사스 주에서 입법된 일련의 임신중절 관련 법안인 텍사스 주 하원법안 2(Texas HB 2)이고, 원고들은 이 중 두 개의 조문에 대한 헌법적 심사를 요구하고 있다. 첫 번째 조문은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의사가 그 병원에서 30마일 이내에 있는 큰 병원에 환자이송 특권(admitting privileges)을 취득하도록 규정하는 규정이다. (역주: 환자이송 특권이라고 번역한 이 권리는 사실 이송을 받는 병원의 준 스태프로 취급받아 병원과의 상의 없이 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 대개의 병원들은, 특히 남부의 보수적인 주에서는, 외부의 임신중절 시술을 시행하는 의사에게 이러한 권리를 주어 시위의 명분을 주고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의학의 발전으로 로 대 웨이드 사건의 3분설(임신 기간을 3단계로 나누어서 단계별로 임신중절 허용여부를 일률적으로 규정했던 종전 판례의 태도)을 폐기하고, 태아의 독립적인 생존가능성과 여성의 권리를 형량하되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각 주가 여성에게 ‘과중한 부담(undue burden)’을 지우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자 정하라는 태도의 가족계획연맹 대 케이시 판결 이후, 특히 최근 공화당이 압도적으로 이긴 보수적인 주에서는 환자이송 특권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신설하는 방식으로 이론적으로는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주 안에서의 임신중절 시술가능성을 차단해버리곤 한다.) 두 번째 조문은 임신중절을 시술하는 병원이 “외래수술센터(Ambulatory Surgical Center)” 시설규제에 부합하는 시설을 갖출 것을 요구하는 조문이다. 이러한 조문이 시행될 경우, 텍사스 주의 가임기 여성 540만 명이 찾는 임신중절 병원 중 75%가 문을 닫아야 한다. 헌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이 540만 명의 여성들이 규제를 살아남은 단지 10개의 임신중절 병원만을 이용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심지어 가장 가까운 병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200마일을 이동해야 하는 것이, 케이시 판결이 금지하는 임신중절의 권리에 대한 ‘과중한 부담(undue burden)’이 아닌지 여부에 관한 것이다. 여성 대법관들은 모두 각각,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시술 중 하나인 임신중절을 위해 시골에 사는 여성이 캘리포니아 주 만한 땅덩이를 가로질러 병원에 와서, 수술 설비가 된 병원에서 단지 알약 한 알을 받아 의사 앞에서 복용해야 한다는 관념에 대해 지팡이를 휘둘러가며 분개하고 있다.

오늘 아침의 구두변론에서 가장 처음 문제가 된 것은 불가사의하고 기술적인 토론이었고, 이 토론은 스테파니 토티 변호사에게 허용된 시간을 거의 다 잡아먹었다. 텍사스 주의 임신중절을 시술하는 병원들을 대리하는 토티 변호사는 우선 그 병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상고 내용에 모두 반영하지도 못했다는 긴즈버그 대법관의 주장에 답해야만 했다. 이 주장과, 로버츠 대법원장 및 알리토 대법관이 제기한 이 법에 의해 텍사스 주의 병원들이 문을 닫았다는 증거가 충분하냐는 사실인정 측면에서의 문제제기 때문에, 토티 변호사는 소의 이익에 관하여 말할 시간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그저 병원들이 HB 2가 통과되고 나서 며칠 새 우연히 닫았을 수도 있지 않냐는 보수 측 대법관들의 반복된 질문에 짜증이 난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마침내 개입한다. “내가 이해한 게 맞나요,” 그녀는 토티 변호사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외래수술센터’ 조문이 신설되어 시행된 뒤 2주 만에 열 개가 넘는 병원들이 문을 닫았고, 이 조문이 집행정지되어서 효력이 없어지자 이 병원들이 즉시 재개장했다고요?” 토티는 동의했다. “완전히 통제된 실험이네요.” 케이건 대법관은 이어서 말했다. “이 법의 효과로 인해서, 그렇지 않나요? 이 법이 효력을 발휘하면, 12개 병원이 문을 닫아요. 이 법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중지하니까, 병원들이 다시 열었죠?”

이 사건을 좌지우지하는 입장에 선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이 부분에서 처음으로, 이 사건을 하급심 법원으로 파기환송하여 남은 병원들로 주 내의 임신중절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지를 다시 심리를 통해 확인토록 하는 것이 “적절”하고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을 내비쳤다.

이 사건이 하급심 법원으로 파기환송된다면, 연방대법원은 이후 다시 이 사건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텍사스 주의 여성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런다면 적어도 로 대 웨이드 사건이 보장한 임신중절의 권리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을 것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토티 변호사의 남은 시간 중 상당부분을 케이시 사건의 “과중한 부담” 심사가 이 법을 통과시킨 주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주장하기 위해 썼다. 토티 변호사가 연방대법원이 케이시 사건에서도 임신중절에 관한 규제를 심사하면서 주의 의도를 주의깊게 살폈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답변한 뒤였다. 이 부분에서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갑자기 자신이 말할 것이 있다고 판단했고, 주저 없이 말했다. “임신 초기 중절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약물에 의한 임신중절, 이건 병원의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죠. 의사가 알약 두 개를 처방하고, 여성은 그 알약을 집에서 복용합니다. 맞나요?” 토티 변호사는 텍사스 법에 의해 여성이 그 약을 병원에서 복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소토마요르가 다시 묻는다. “아니 잠깐, 뭐라고요? 그러니까 그 알약 두 알 먹겠다고 다시 병원에 와야 한다는 소리인가요? ... 그저 집에 가져가서 먹을 수도 있는 알약을, 다시 200마일을 이동하거나 아니면 호텔을 잡으면서까지 다른 날에 다시 병원을 방문해야 한다고요?”

토티 변호사는 동의하고, 약물에 의한 임신중절을 “수백만 달러짜리 수술센터”에서 한다고 해서 의료적인 이익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고 부연한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두 가지 임신 초기 중절에 관한 질문을 끝낼 시간을 요청하고, 대법원장은 반쯤 포기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유산 시 시술되는 경관확장자궁소파술(dilation and curettage)은 아무 산부인과에서나 할 수 있는데, 왜 임신중절의 경우 경관확장자궁소파술을 ‘외래수술센터’에서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토티 변호사는 대답하고,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계속 말한다. 대법원장은 토티에게 감사인사를 하나, 소토마요르는 막무가내로 꼭 병원에서 알약을 복용해야만 하는 다른 의료절차가 있는지를 묻고야 만다. 토티가 없다고 대답하자,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그제야 만족하고 물러났다.

연방 법무차관 돈 베릴리는 아마도 수요일 아침 오바마 행정부를 대리하여 10분짜리 흠 없는 진술을 해낸 것을 충분히 인정받지는 못할 것이다. 그는 이 이슈에 관한 가장 간단한 설명으로 진술을 시작했다. “이 법은 텍사스 주 안에 있는 대다수의 임신중절 시술 병원의 문을 닫게 하고, 닫지 않은 몇몇 병원에 극도의 부담을 지우며, 텍사스 주 안에서 임신중절 방법을 찾는 여성들이 가진 어려움을 기하급수적으로 가중합니다. 그리고 이런 조치의 근거는 전미의료인협회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하며 연방지방법원이 오히려 여성들의 건강상 위험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판단한 의심스러운 의료적 주장뿐입니다.”

새뮤얼 알리토 대법관은 이 말에 설득되지 않았다. “[이 규제의] 많은 부분은 ... 기본적 안전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특별히 낙태와 관련이 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병원의 입구가 평면이어야 한다.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한다. 들것을 옮길 수 있을 정도로 복도가 넓어야 한다.” 알리토 대법관은 나중에는 “호울 우먼즈 헬스 병원의 시설검사 결과 충격적인 위반사실이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시궁쥐들이 돌아다녔다고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임신중절의료제공자에 대한 표적규제(TRAP laws)라는 말에 이로서 새로운 의미(Trap(덫))가 부여되었다.)

베릴리 법무차관은 대법관들에게 케이시 판례가 보장한 바로 그 권리를 박탈하는 위험성에 대하여 설명하며 진술을 마무리 지었다. “이 법이 합헌이라고 판결하는 것은, 임신중절의 권리가 이론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결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날 구두변론의 나머지 부분은 네 명의 진보측 대법관이 텍사스 주 법무차관 스콧 켈러를 영혼까지 탈탈 터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긴즈버그 대법관이 켈러 차관에게 먼저, 임신중절이 가능한 병원으로부터 100마일 이상 ᄄᅠᆯ어진 곳에 사는 여성이 몇 명인지를 물었다. 켈러 차관이 엘 파소에 사는 여성은 뉴 멕시코 주로 넘어가서 임신중절을 할 수 있다고 말하자, 긴즈버그 대법관은 갑자기 그를 멈춰세웠다. “그것 참 이상하군요.”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뉴 멕시코 주의 병원을 언급한다는 것이 말입니다. 뉴 멕시코 주에는 ‘외래수술센터’ 조문이 없고, 환자이송 특권 조문도 없는데. 당신 주장에 따르면 뉴 멕시코 주의 병원은 텍사스 주의 여성들에게 가능한 대안이 될 수 없지 않나요? 텍사스 주는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한다면서요?” (나는 이 부분에서 2014년께 긴즈버그 대법관이 은퇴해야 한 대고 주장했던 남자들 한 명 한 명을 생각하면서 그저 미소를, 미소를, 미소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역주: 현재 진보측 대법관의 좌장인 긴즈버그 대법관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은퇴하고 오바마가 후임을 지명토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이 주장들을 진지하게 상대하지 않는 중이다. 오히려 스칼리아가 먼저 죽고, 또 한 명의 진보측 대법관이 긴즈버그 대법관과 함께 논의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70년대부터 활동한 페미니스트 변호사 출신인 긴즈버그 대법관이 임신중절권 관련 사건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주장을 한 사람들을 놀리는 것이 하나의 패턴이 되어 있다. 이 맥락에서 달리아 리트윅 또한 ‘미소를’ 짓는 것이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끼어든다. “당신 말에 따르면 정말 조그마한 보건상의 개선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십만 명의 여성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내가 당신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물론 그 주장은 지금 논박되고 있는 것이니까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만, 아무튼 조그마한 이익만으로도 여성 수십만 명의 삶에 부담을 지울 수 있다, 그게 당신 주장이라고요?”

긴즈버그.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네요. 수술을 할 것도 아닌데 여성들이 알약 두 알을 그 ‘외래수술센터’에서 먹는 게 무슨 보건상 이익이 있다는 거죠?”

그리고 케네디 대법관은 켈러 차관에게 놀라운 질문을 던진다. 이 법의 효과가 혹시 “약물에 의한 임신중절이 아닌 수술에 의한 임신중절 수를 늘리기 위한 것”인지가 궁금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의학적으로 현명한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브라이어 대법관의 차례다. “법이 두 개 있어요. 나는 그 중에서도 특히 첫 번째 법에 집중하고 있는데요. 그 법은 임신중절 시술을 하는 병원의 의사는... 근처(nearby)의 병원으로부터 환자이송 특권을 받아야 한다는 것, 맞습니까?” 네, 켈러 차관이 대답한다. “그럼 이미 다른 병원과 환자이송 협약이 체결되어 있음에도, 단지 임신중절 시술을 하는 의사가 환자이송 특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합병증이 발생했는데 큰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한 여성에 관한 내용이 기록에 있나요? 어떤 여성분입니까? 몇 페이지에 그런 여성분들의 이름이 있고, 그 분들이 겪은 합병증은 무엇이었으며, 그 합병증은 왜 발생했죠?”

켈러 차관은 그런 내용이 기록에 없다고 답변한다. 브라이어 대법관이 계속 말한다. “그러면 포스너 판사가 판결문에서 이런 사례로 의심가는 사례를 전국에서 딱 하나 발견했고, 그 한 사례도 맞는지 모르겠다고 쓴 게 맞아 보이는군요.” 브라이어는 기대어 앉으며 말을 잇는다. “전국에서 딱 한 건 있었는지조차 정확하지 않은 문제, 그것도 텍사스 주에서 일어난 것도 아닌 문제를 고치기 위한 절차를 도입하는 게 여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것이죠?” 사람들이 모두 웃었다.

케이건 대법관은 텍사스 주 입법자들이 모든 임신중절 시술을 하는 병원에 대해 매사추세츠 주 종합병원의 기준을 적용할 것인지 여부를 궁금해 했다. “왜냐하면 매사추세츠 주 종합병원은 진짜 좋은 병원이거든요.”

이 기회를 틈타 케네디 대법관이 중요한 한 마디를 더했다. “이것만 봐도 과중한 부담 심사 결과가 텍사스 주의 이익이 없다는 쪽으로 날 것 같지 않소?”

그리고 이제 케이건 대법관이 움직인다. 조용히, 포커페이스로, 그녀는 켈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법에 따르면... 텍사스 주는 더 높은 수준의 의료적 기준, 그러니까 의료인력이든 절차든 아니면 시설에 관한 것이든, 아무튼... 임신중절 시술을 제공하는 병원에 대해 다른 어떤, 심지어 임신중절보다 위험성이 높은, 시술을 하는 병원보다 높은 의료적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내 말이 맞나요?”

켈러 차관은 동의한다. 그리고 케이건 대법관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그냥 궁금한 겁니다만, 텍사스 주는 왜 그런 규제를 하죠?” 갑자기 법정이 소란스러워진다. 켈러 차관은 합병증을 언급한다. 케이건 대법관은 지방흡입이 더 큰 합병증 위험을 가진다고 말한다. 켈러 차관은 커밋 고스넬을 언급한다. (역주: 커밋 고스넬은 임신중절을 하려는 여성들을 유인하여 가혹행위를 하거나 살해한 악명 높은 펜실베니아 주 범죄자이다. 이러한 범죄를 막기 위해 임신중절에 대한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보수측의 논거이다.) 케이건 대법관은 텍사스 주에 이미 존재했던 규제들만으로도 고스넬 사건과 같은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논박한다. 소토마요르 대법관이 대장내시경이 더 큰 합병증 위험을 가진다고 거든다. 마침내 켈러 차관은, “그렇지만 입법자들은 공적인 관심을 받는 주제에 관하여 반응합니다.”라고 말하고 만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여성의 건강이 아닌, 정치가.

변론조서의 이 부분 – 70페이지 –에서 우리는 케네디 대법관이 “소니아 끝났는데.”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 법정에서 듣지는 못한 말이다 –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음성파일이 공개되는 금요일에는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저 이 난장판을 좀 더 즐겨보자.

켈러 차관에게 주어진 시간은 끝난 지 오래지만, 긴즈버그 대법관은 물을 수밖에 없다. “당신 변론 초반에, 임신중절 시술 병원에서 가까이 사는 여성이 수를 언급한 부분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케이시 판례가 시사하는 건 법으로 인해 부담을 받게 되는 여성들이 중요하다는 것 아닌가요?”

켈러 차관은 케이시 판례의 배우자에 대한 통지 조문 같이 위헌적이었던 심판대상 조문과 지금 문제가 된 텍사스 주의 법은 성질이 다르다고 대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 텍사스 주의 법은 “의료인과 의료기관 규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전설인 긴즈버그 대법관은 아연실색한다. “아니 지금 이 사건은...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본권을 가진 여성에 관한 것이란 말입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켈러 차관을 직접 눌러서 앉혀버릴 기세였지만, 긴즈버그 대법관은, 아마도,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이 날 아침 구두변론 동안 가장 많이 떠오른 것은, 물론이지만, 고 스칼리아 대법관이었다. 스칼리아 대법관은 구두변론 동안 안 그래도 큰 풍채보다도 존재감이 세 배는 되어버린다. 언젠가 판결을 선고하던 스칼리아 대법관이 임신중절을 시술하는 병원들을 “낙태 방앗간”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알리토 대법관은 자신의 역할과 스칼리아 대법관의 평소 역할을 모두 수행하느라 지쳐 보였고, 오늘은 별다른 말이 없었던 클래런스 토마스 대법관은 브라이어 대법관과 잡담을 나누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스칼리아 사후 2주가 지난 지금, 대법원장이 단지 이 여성들을 저지하느라 지쳐버렸다는 것은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본 바에 따르면, 전투적 문화전사인 스칼리아 대법관은 대체불가능했다. 스칼리아 대법관이 없이 연방대법원의 보수주의자들은 HB 2 통과의 결과로 이들 11개 병원이 문을 닫았다는 증거를 더 많이 요구하는 정도 밖에는 할 수 없다. 스칼리아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말들이고, 스칼리아는 이런 반격을 “약해빠진 헛소리”로 치부했을 것이다.

이 사건이 텍사스 주로 파기환송된다면, 거기서 다시 시작하여 이번에는 몇 년 뒤에 아홉 명의 대법관들이 이 사건을 다룰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이 어두컴컴한 심연의 연구실에서 무엇을 소환해낸다 하여도, 우리가 오늘 본 폭주하는 4량 열차들 같이 맹렬한 새 대법관을 임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당신이 ‘반동성애 동아리’가 있는 학교 이름을 처음 들어본 이유

대충 파악해본 바, 소위 ‘반동성애’ 모임이라고 주장하는 트위터 계정은 여섯 개 정도가 살아남아 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계정은 KC대학교라는 대학 재학생이 만든 계정이었고, 그는 트위터를 폭파했지만 여전히 ‘성다수자 인권위원회’라는 이름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백석대학교에도 뭔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 남은 계정은 ‘고신대학교 반동성애부’, ‘한세대학교 반동성애모임’, ‘서울신학대학교 반동성애모임’, ‘신안산대학교 반동성애부 ‘사우나’’, ‘호서대학교 반동성애부’, ‘전주대/비전대 반동성애모임’ 이렇게 여섯 개인 듯하다.

한 때 ‘전동동(전국 대학교 동성애 반대 동아리 연합)’이라는, 누가 봐도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의 존재에서 실마리를 얻은 것으로 보이는 요상한 계정도 있었는데, 그 계정은 패러디적 의도를 밝히고 활동종료했다. 개인적으로 매우 노잼이며 왜 했는지 모르겠지만... 노잼의 자유 또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시대가 2016년인데 아닌 밤중에 반동성애 모임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몇 명 출몰하고 있다. 저 리스트를 본 뒤라면 아마도 당신 또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도통 어디 붙어 있는 대학인지를 모르겠다. 지독하게도 학벌주의적인 생각이지만 그렇다. 그리고 저들 또한 학벌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징후가 있다. KC대학교 재학생은 자신이 재학중인 대학이 ‘인서울 대학’이라는 처연한 포스팅을 했다. 누구나 이름을 들어본 대학에 재학한다고 한들 2016년에 반동성애를 자랑스럽게 내걸 수 있는 정도의 지성으로 무슨 희망이 있겠냐만, 반동성애 모임을 자처한 계정주들은 자신의 기치를 설명하기 전에 자기 학교의 위치를 명시하고 우리 학교가 어떤 학교인지를 설명해야하는 나름의 고충을 가지고 있다. (각 트위터 프로필 참조)

왜 이들 자칭 반동성애 모임 계정에는 들어본 적 없는 대학 이름만 내걸릴까? 자칫 착각해서는 안 된다. ‘수준 낮은’ 대학에서나 반동성애 어젠다가 먹히고 있고, 소위 ‘수준급’ 대학에서는 그런 주장이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이 반동성애 활동을 트위터에서 개진하게 된 것은, 이들이 반동성애 활동에서도 후발주자이기 때문이다. 대학생 성소수자 당사자 운동이 개진된지도 어언 20년이 흘렀는데, 이 역사만큼이나 대학 내 반동성애의 역사도 길다. 잠깐 짚고 넘어가볼까 한다.



동성애혐오자들은 동성애자가 드러나 보이지 않으면 규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학 내 반동성애의 역사를 95년도부터 세어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 해 4월 연세대학교 ‘컴투게더’와 서울대학교 ‘마음001’의 결성을 필두로 결성된 성소수자 모임들은 2016년 현재 40여개가 모여서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를 결성하고 있고, 아직 QUV에 연대하지 않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모임들이 있으며, 새로 만들어지려는 준비 단계의 모임들도 많다. 마음001을 제안한 이정우 활동가가 삐삐와 우편함으로 혐오성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성하고 모임을 공식화한 사람들이 어떤 혐오의 폭풍에 시달렸을지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확실한 사실은 폭풍은 곧 잦아들기 마련이란 것이다. 관심이 떠나간 뒤, 끈덕지게 집착하는 열성 호모포비아와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때의 이야기는 드문드문, 정황에 의해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정황들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1998년 ‘마음006’ 시절, 서울대학교 성소수자 모임은 영화제 리플렛에 ‘HOMO 찢어 죽여’라고 써서 동아리방 앞에 투척한 혐오범죄를 직면했다. 이 때 ‘마음006’은 가동아리 등록-정동아리 등록 후 동아리방을 배정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는데, 아직 살아있었던 ‘운동권’적 정치적 올바름의 지표에 의해 성소수자 동아리에 대한 전향적 결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동아리연합회에도 많았으므로 꽤 무난하게 정동아리가 되었다는 공적인 회고와 사뭇 다르게, 종교분과의 방해를 기억하며 원한을 토로하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다.

혐오자들은 꽤 수줍음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드문 사건 중 하나는 2008년 이화여대에서 일어났다. 이화여대 성소수자 인권운동모임(당시 레즈비언 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하늘을날다’는 레즈비언 문화제 기간 동안 학생문화관에 무지개 걸개를 게시했다가 도난당했고, CCTV를 확인한 끝에 범인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레이트비전’이라는 선교 동아리의 임원진이었던 이들은 당연히 학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았으며, 동아리연합회 총회에서 장시간 사과요구를 받다 “그래도 동성애는 죄”라며 자폭한 끝에 동아리 제명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였다. 2012년 서울대에서도 서울대학교 성적소수자 동아리 QIS의 홍보물에 “How Could Your Life Be Created?”라는 브로큰 잉글리시 막도장을 찍고 다닌 후 이를 졸업전시로 제출한 미대생이 문제되었다. 이러한 작업을 지도하고 승인한 미술대학의 시스템이 가장 비판받아야 하지만, 해당 미대생이 미대 크리스천 모임의 열렬한 멤버였다는 사실 또한 의미 있는 디테일이다.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으나 역사가 오래된 성소수자 모임에는 도시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 중 하나라면 역시 성소수자 모임이 발간한 자료집이나 학내 언론을 밤에 몰래 수거해서 가져다 버리는 신실한 분들의 존재이다. 학교 안에서 성소수자 모임들은 여전히 ‘반대’와 반달리즘에 직면하는데, 당장 2014년에도 95년 창립된 동아리 중 하나인 고려대학교 사람과사람, 2008년에 한 대거리를 한 이화여대 변태소녀하늘을날다 등의 홍보물이 훼손되었고, 동아방송예술대학교 디마이너는 심지어 ‘다이(Die)마이너’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의 스토킹에 시달렸다. 다행히도 다이마이너는 개인의 일탈행동에 가까웠던 듯하고, 의심되는 사람의 졸업 후 별다른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거칠게 일반화해보자면, 대학가의 성소수자 혐오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가 사회화 덜 된 초딩들의 잔인하고 유치찬란한 괴롭힘 같은 감정이라면, 다른 하나는 개신 기독교이다. 그 중 특히 후자는 조직적으로,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을 동원해 총력적으로 ‘동성애 저지’에 나서며, 이들 중 다소 이성적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자들은 절도와 같은 실정법 위반에 이르곤 한다. 때 아닌 ‘반동성애모임’의 출현에 직관적으로 개신 기독교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연상작용이다. 지금 고신대학교 반동성애부를 자처하는 트위터 계정의 주인이 주요셉 목사와 깊은 교분을 나누는... 그런 것 말이다.



주목할 만한 혐오의 축이 개신 기독교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저들 대학 중 상당수가 기독교 계열 학교라는 사실이 이를 다시 한 번 예증한다. 20년간 익명성 뒤에 숨은 채 대학생 성소수자들을 스토킹하며 괴롭혀 온 일부 개신 기독교 단체 및 기독인 개인의 경우, 2010년대 들어서 쇠락의 위기를 맞고 있다. 신도 수와 회원의 수가 급감한다. 공격성을 내재한 전도 방식에 대한 반감은 뿌리 깊다. 애초에 자신의 혐오에 의문을 품지 않은 뻔뻔한 일부 개신 기독교인들에게 동성애는 내부 규합을 위한 외부의 적이 되며, 슬프게도, 꽤 진보적이었던 개신 기독교 계열 단체인 한기연조차 조직 보위를 위해 이런 저런 통밥을 굴리다 고 육우당을 모독하기에 이르러, 내부 역량 배양의 실패와 독선, 아집으로 똘똘 뭉친 스톡홀름 신드롬 상태를 여실히 드러냈다. 한기연은 현재 6개 대학 내 연합동아리이고, 그 중 일부 대학에서 회원 수 급감으로 인하여 동아리방을 반납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트위터에서 본의 아니게 언급된 저 대학들에서는 일어난 적 없는 일일 것이다. 우선 대부분 개신 기독교 계열의 대학이고, 내부적으로 탄압할 만큼 가시적인 성소수자들의 결사가 있었던 적도 없는 학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대학 내 반동성애/반성소수자 어젠다의 적자가 아니다. 필드에서 뛰면서 자보를 붙이고 찢어봤다거나 성소수자들이 만든 문건을 절도하여 폐기하는 실정법 위반까지 저질러본 사람은 없다. 갓 대학에 입학한, 멋모르는,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풍월이 전부인, 그런 자들이다. 그들의 돌발행동이 트위터 계정으로 터져나온 것뿐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에 매우 익숙하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홍어 운지 드립을 치는 어떤 학생들이 오뎅을 먹으며 손가락을 이상하게 꼬아 일베에 인증샷을 올린다. 저들은 그저 인터넷을 떠도는 혐오자들 중 하나일 뿐이고, 트위터라는 플랫폼에 자신이 다니는 대학 이름을 걸어두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의 존재를 인터뷰까지 해가며 기사화한 한겨레 신문의 기사는 좋지 않은, 무책임한 기사였다. 오늘 한세대 반동성애 모임 계정은 계정주가 즐겨 다니는 토렌트 공유 사이트 주소를 트윗했다. KC대학교 재학생은 개인 블로그에 광고를 달겠다는 공지를 올린다. 그들은 ‘모임’을 자처하지만, 실제 그들이 모임의 실질을 갖추었는지, 그리고 그들이 설마 복수의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집합을 모임이라고 부를 수 있기나 한지 우리는 아는 바 없다. 그들이 ‘모임’을 자처한 이유는 분명하다. 각 대학 내에서 20년의 맥락을 가지며 사람을 모으고 발전해온 대학성소수자모임이라는 가시적인 대조군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주장대로 ‘모임’이라고 받아 적어 줌으로써, 한겨레 신문의 기사는 이들을 그러한 대학성소수자모임과 동급의 상대로 승급시켜 링에 올려주었다. 그 기사의 세계관에는 20년간 대학사회 안에서 성소수자들이 반성소수자 어젠다와 치루어 온 투쟁의 역사와 천여 명의 학생들이 결성한 네트워크인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같은 단체의 실체는 무시된다. 저들 자칭 반동성애 모임을 조망하는 데는 'XX대학교 부먹/찍먹성애자 모임'과 같은 방식이 훨씬 적절하다는 명백한 사실 또한 그렇다. 한겨레 신문의 기사는 전반적인 논조에서 읽을 수 있는 선의에도 불구하고 무지라는 가장 큰 과오를 저질렀다. 이는 골방에서 자위하는 트위터 상의 자칭 반동성애 모임 계정주 대여섯 명이 저지른 것보다 훨씬 큰 해악이다.

어려운 선택들(Hard Choice)

* 한국 트위터 스피어에서 읽게 되는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어떤 태도가 나에게 주는 공포에 관하여 꾸준히 말해온 바 있다. 항상 그러했듯이 미국 진보-페미니스트 블록 내부에서는 젊고 혁신적인 후보와 여성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고, 그 간극이 가장 심화된 것이 샌더스와 힐러리의 경선일 것이다.

* 나는 미국인이 아니고, 미국 대선에서 누구를 뽑을지는 나에게 진지한 고민의 대상이 아니다. 항상 말해왔듯이 내가 관심을 가지고 두려워하는 것은 미국의 대선을 보는 어떤 한국인 집단들의 시각이다. 말하자면 '보수가 아닌' 샌더스에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이입한다든가, 'progressive'가 아닌 '진보'라는 말을 단선적으로 샌더스와 동치하여 힐러리 클린턴의 존재를 슬며시 지우는 태도, 혹은 '여성 대통령'이 가지는 의미를 불편하고 잘 들어맞지 않는 한국 정치상황과의 알레고리를 통해 비웃으며 눙치는 일면의 태도 같은 것들이다.

* 솔직히 말하자면 같은 기분을 샌더스 유세 중계를 보면서도 느낀 적이 있다. 샌더스에게 환호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것이 분명한, 젊은 남성들의 집단적인 괴성이 주는 공포가 있었다. 뭐, 이성애자 남성들이 작정하고 달려들면 이길 도리가 없다, 이런 기분이다. 내 목소리는 저 소리의 일부가 될 수 없으면서 저 소리에 묻히고 말 것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공포인 듯하다.

* 이 글은 사실 번역을 해야할지 고민이 많이 되었다.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는 진보들의 글은 대개 "그럼에도 '이 때문에' 힐러리를 지지한다" 부분에서 꼬이고 만다. 그럼에도 번역을 굳이 한 이유라면, 이 공포와 억울함, 소수집단으로서 가지게 되는 멘탈리티를 꽤 잘 서술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Slate의 이 글을 트윗한 어떤 사람의 트윗에 달린 답글들이 내 공포를 다시 한 번 예증하였다. 








나는 힐러리를 싫어해왔다. 그러나 이제 그녀를 뽑을 생각이다.




힐러리 클린턴을 싫어할 때는 그녀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이 더 쉬웠던 것 같다.

2008년 민주당 경선 기간 동안 나는 젊은 여성들의 죄책감을 자극하여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할 것을 설득하는 2물결 페미니스트들과 힐러리 클린턴 자신에 대해 분노했다. 당시 나는, 끈질기게 중도만을 지향한 빌 클린턴의 실망스러운 임기를 뒤로 한 채 버락 오바마라는 탁월한 인물을 뽑을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오바마라는 매력적인 대안 앞에서 어떻게 빌 클린턴의 아내를 선호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국론을 통합하겠다는 오바마의 약속을 조롱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열리고, 빛이 내릴 것이며, 천상의 성가대가 노래하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옳은 일을 하면 세상이 완벽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시 그녀는 단순히 사람들에게 영감을 심어주는 데 실패한 것만이 아니었다 –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 자체를 비웃는 듯했다.

나는 힐러리 클린턴이 해온 실망스러운 일을 모두 기억한다. 복지개혁을 찬성한 일, 이라크 전쟁에 찬성한 일, 국기를 태우는 일을 처벌하는 상원 법안을 공동발의한 일. 클린턴이 페미니스트적인 기준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통렬히 논박하는 글을 쓰고 또 썼다. 사실 나는 그녀가 “많은 개발도상국 또는 위기에 처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위대한 인물의 아내나 딸이 그의 유산을 승계하겠다는 현상”을 예증한다고 주장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로빈 모건, 린다 허시만 같은 윗세대 페미니스트들이 오바마를 지지하는 젊은 세대 페미니스트들을 폄하했을 때 나는 격노했다. “페미니즘이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것과 동치라면, 많은 사람들이 그 따위 것과는 어떠한 관계도 맺고 싶지 않을 것이다.” 나는 코웃음치며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8년이 지난 지금 내가 클린턴을 지지할 뿐만 아니라, 그녀에 대한 좌파적 비판에 짜증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이 말하는 클린턴이 안 되는 이유를 나도 안다. 많은 부분 동의한다. 클린턴이 저지른 많은 과오가 그녀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의미할 위험성을 나도 우려한다. 그러나 지금, 이상론적인 정치운동을 펼치는 젊은이들에게 냉대 받는 그녀를 보며, 나는 기쁘다기보다는 슬프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8년 클린턴은 퍼스트 레이디 경력을 내세워 남편의 세 번째 임기를 위해 선거에 출마한 것처럼 보였다. 그 이후 그녀는 국무장관으로 괄목할 만한 경력을 만들었다. 그녀는 이제 오바마 행정부의 뜻을 잇겠다며 선거에 나섰다. 그녀가 결혼한 사람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라는 사실은 이제 거의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그녀가 던지는 메시지 또한 다르다. 지난 번 경선에서 그녀는 대부분의 전략을 혐오스러운 마크 펜에게 위임하였는데, 그는 힐러리를 마거렛 대처처럼 터프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유권자들은 “여성 리더(first mama)”를 원하지 않는다고 그는 썼다. 그러나 “리더가 여성인 것(first father being a woman)에는 열려있다”고도 썼다. 이번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은 페미니즘을 강조하고 있다. 유급 출산휴가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은 그녀의 핵심 공약이다. 심지어 가난한 여성들의 임신중절에 대한 연방 예산 지원 금지에 반대한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했다. 임신중절의 권리를 지지하는 것은 정치적 금기다. 힐러리 클린턴이 여성 권리를 앞장서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점점 여성 대통령의 가능성을 고려하면서 흥분했고 그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클린턴이 이번에는 아주 다른 유형의 후보를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버락 오바마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연맹을 혁신적으로 확장한 정치적 재능을 지닌 사람이다. 버니 샌더스는 그보다 자신의 정치를 하는 좋은 사람이지만, 나는 그가 11월 대선에서 갈아뭉개질 것을 거의 확신하고 있다. 물론 샌더스 캠프는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된 사람들을 선거장으로 불러낼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나 내가 정치를 보아온 바에 따르면, 상호 연결되지 않은, 평소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이 충분히 진보적인 후보가 나온다면 갑자기 선거장을 가득 메울 것이란 꿈은 좌파들의 판타지에 불과했다.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희망적인 관측을 동원하지 않은 사람을 본 적 없다.

나도 여전히 버니 샌더스를 느끼고 플(feel the Bern) 때가 있다. 음침한 실용주의보다 정치 개혁의 쪽에 서는 것이 더 짜릿하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그저, 믿을 수가 없다. 말인즉슨 나는 수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클린턴에게 걸겠다는 소리다. 그리고 클린턴에게 거는 일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

2008년 선거 이후로 나는 내가 한 때 클린턴을 반대하는 이유였던 더러운 타협을 클린턴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해가고 있다. 작년에 나는 the Nation에 그녀와 진보의 불편한 관계에 관한 커버 스토리를 썼다. 그녀의 자서전과, 그녀 남편이 이끈 행정부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그녀가 함께 일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서, 그리고 1990년대 뉴스기사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지금처럼 기업에 영혼을 판 사람이라고 공격받기 전에는, 극단주의자 페미니스트라고 공격받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남편보다 좌파에 경도되었다는 비판을 들었고, 이는 남편의 정치적 생존을 위협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극도의 압박을 받은 끝에 그녀는 자신을 과하게 교정했고, 회의주의적인 주류 언론에게 그녀가 합리적인 중도주의자라는 사실을 설득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중도지향적인 태도는 그녀에게 있어 거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90년대부터 물론 미국 정치는 훨씬 더 양극화되었고 민주당원들은 좌파 축으로 이동했다. 그 결과, 클린턴에게는 비극적인 아이러니라고 해도 좋을 일이 일어났다. 이제 그녀는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한 때 여겨졌던 것처럼 극단적인 좌파라는 사실을 다시 설득해야만 한다. 더 능숙한 정치인이라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에게 툭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클린턴은 그걸 하지 못한다.

나는 클린턴이 진정한 자신의 겉 표면에 견고한 외피를 만든 것을 비난하지 않는다. 미국에서 그녀보다도 지속적으로 대중의 검열을 받아온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수천, 수만 마디의 말로 그녀의 헤어스타일을 비웃었다. 그녀가 웃는 방식, 주름, 관절, 옷은 모두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미디어는 계속, 지속적으로, 사람들이 그냥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녀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20년 연속 선정되었음에도 말이다.) 당연히 힐러리 클린턴은 가드를 내리는 게 힘들 수밖에 없겠지! 그 정도의 자기방어기제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녀의 자리에 있었던 다른 어떤 여성이라도 미치게 만들었을 대중적 조롱을 받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클린턴이 그리 좋은 정치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공격에 처했을 때 클린턴은 가드를 올리거나 물타기로 전환해버린다. 11월의 민주당 경선 후보 토론회에서 그녀는 월 스트리트와의 연관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9/11을 들먹였다. 바로 지난 주에도 그녀는 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정치적 기득권의 일부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골드만 삭스에서 자신이 한 강연회 원고를 공개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 원고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든, 계속 비밀을 고집하는 것보다 그녀에게 정치적으로 더 큰 타격이 될 수는 없음에도 말이다.

좀 더 민첩한 민주당원이라면 도널드 트럼프를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패한 시스템에서 쌓아온 경험 덕에 그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그녀는 Citizens United 판결(Super PAC이 헌법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하여 미국 선거를 금권선거로 바꾸었다고 비난받는 판결)을 뒤집을 연방대법관들을 임명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판결이 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Super PAC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세계 권력의 중심에 그토록 가까이 서 있었으면서도 여성이기 때문에 종종 아웃사이더가 되어왔던 경험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녀는 유리천장 바로 아래 서 있을 때 어떤 기분인지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그녀가 겪어온 일들을 고려할 때 힐러리 클린턴이 유권자들에게 솔직하게 다가가기 힘들어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그녀와 그녀가 이기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는 문제적 상황이다. 좌파이면서 클린턴 지지자인 것이 짜증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에 대한 진보세력의 비판이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매파다. 그녀는 남편의 대통령 임기 중에 복지개혁에 찬성했다. 그녀는 월 스트리트가 미국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조심스럽고 계산적이다.

그런데 이들 비판에서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엄연한 사실들이 또한 있다. 사람들의 평가에 따르면, 힐러리 클린턴은 남편의 복지개혁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이는 그녀가 주장한 보편적 건강보험 프로그램이 1994년 중간선거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었다. 상원에서 그녀의 법안 찬반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오바마나 조 바이든보다도 좌측에 있다. 그녀는 오바마 대통령의 이란 핵 협상을 열렬히 지지함으로써 그녀를 지지하는 억만장자 하임 사반을 잃었다. 그녀는 여성 재생산권의 강력하고 지속적인 지지자였다.

진보주의자에게 있어 클린턴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그녀에게 어느 정도 공감하느냐에 달려 있다. 클린턴을 지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그녀가 한 수천가지의 타협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타협을 정당화하는 일은, 내 생각엔, 늙었고 스스로 타협을 해본 사람에게는 더 쉬운 일이다. 실제로 종종 클린턴을 옹호하는 일이 중년을 옹호하는 일과 동일하게 느껴진다. 그 모든 기대가 옅어지고, 때늦은 후회의 무용함을 상기하게 되는 중년 말이다.

클린턴에게 공감하는 일은 그러나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는 그녀가 다시 한 번 대중적인 모욕을 겪는 모습을 보아 넘겨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녀의 페미니즘적인 주장에 대한 여성들의 무관심에 관한 이야기들, 그녀에게는 카리스마가 부족하다는 소위 전문가들의 의견의 소용돌이 같은 것들을 말이다. 이는 우파들만큼이나 좌파들도 나이든 여성을 한심하게 본다는 사실을 꾸준히 상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이는 미국 사회주의의 재흥이라고 할 수 있을 샌더스 현상을 바라보면서, 기쁨만큼이나 두려움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클린턴이 오바마에게 진다고 하여 부끄러울 일은 없다. 그러나 그녀가 권력을 쟁취하기보다는 선언을 하기 위해 경선에 참가한 샌더스를 상대로 정치적 생명을 걸고 사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는 사실은, 비참한 대중적 모욕이다.

이 모욕 중 어느 정도가 클린턴 개인을 향한 것인지, 그리고 또 어느 정도가 여성으로서의 클린턴을 향한 것인지 알 길은 없다. 앨 고어 또한 진정성을 연출해낼 줄 모른다며 미디어의 비슷한 조롱을 받지 않았던가. 앨 고어는 수많은 비투표층이 랠프 네이더에게 투표하기 위해 줄을 설 것이라는 말에 설득된 진보들의 비웃음을 받았었다. 그러나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높은 첫 번째 여성이라는 점은 그녀가 받는 멸시를 더욱 심하게 한다. 그녀는 우리의 문화가 공적인 삶을 사는 여성에게 바라는 변화하는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스스로를 수차례 왜곡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믿을 수 없어 하는 이유를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그렇게 된 이유를 또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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